STUDY

캐롤 던컨 Carol Duncan「의례로서의 미술관 The Art Museum as Ritual」1995

하다다 2020. 4. 27. 15:22

*수업을 들으며 중간중간 중요하다 생각한 부분만 밑줄 그어 정리한 것이오니,

괜히 퍼갔다가 후회하지 마소서 (나는 몰라요><)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생겨나기 시작한 미술관 건립이 가진 정치, 사회적 동기와 작동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던컨은 먼저 미술관의 건축 디자인이 궁전이나 신전을 모방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이전 시대의 왕권이나 종교적 믿음이 가졌던 진리로서의 권위를 미술관이 소장하는 미학의 논리로 위치 조정하려는 바람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

미술관은 언제나 사원이나 궁전과 같은 의례가 행해지는 이전의 기념물과 비교되어 왔다. 각각의 장소는 서로 상반되는 진리와 연관되어 종교적이고 지속적인 이분법을 이룬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의례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인식과 고민의 순간일 것이다. 동시에, 인류학자들이 논쟁하듯이 우리의 소위 세속적 문화관(심지어 의례와는 상반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례적 상황과 사건으로 가득 차있다. 이중 매우 소수만이 종교적인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세계의 질서, 그것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개인의 장소에 대한 믿음을 공적으로 재현하는 장소를 설립한다는 말이다. 모든 종류의 미술관들은 이러한 소우주의 훌륭한 사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귀중하고 값비싼 장소인 미술관은 이러한 종류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언제나 방문객에게 이들이 구성한 소우주를 안내하는 지도까지 갖추고 있다.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을 뚜렷하게 구별하던 계몽주의적 가정들을 문제시한다면(하나는 신앙을 근거로 하고 하나는 명료하고 객관적인 이성에 근거한다), 우리는 세속적 의식에 숨겨져 있는 의례적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미술관을 통제(관리)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과 진리를 통제한다는 의미다. 미술관들이 오래된 의례가 행해지는 장소와 닮아 있다는 주장은 이들이 가진 구체적 건축 양식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의례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일정한 예정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기대된다.

 

리미널리티 Liminality’는 의례와 관련된 용어로 미술관을 방문할 때 갖게 되는 일종의 주목성에 적용될 수 있다. 벨기에 민속학자인 아놀드 판 헤넵(Arnold Van Gennep)이 사용한 이 용어는, 빅토르 터너(Victor Turner)가 이어받아 인류학 관련 논문에서 의식의 외향적 양태 혹은 정상도 이상도 아닌 일상에서의 문화적, 사회적 상태, 그리고 그것을 얻거나 소비하는 과정을 표현하도록 발전되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상황은 개인들로 하여금 일상의 사회 관계와 실리적인 공간으로부터 물러나와 자신과 자신들의 세계를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터너의 미술관에 대한 통찰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리미널리티라는 용어의 도움 없이도 관객들은 이미 그들이 방문하는 공간이 가진 통과의례적인(ritual of passage) 성격을 오랫동안 인식해왔다. 일상의 존재로서 가지는 물리적인 제한 너머로 이동하여 시간의 밖으로 걸어 나와 더 크고 새로운 관점을 얻는 장소로 말이다.

 

미술관에서 의례를 행하는 자는 바로 관객들이다. 순서가 정해져있는 미술관의 공간과 오브제의 배열들, 그리고 조명과 건축적인 디테일은 무대에 장치와 대본을 담당한다. 물론 모든 미술관이 동일한 정도의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구도자가 내부에 들어서서 이정한 지점에서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는, 미리 구축되어 있는 여정을 따라가는 중세의 성당과 닮아 있다.

 

마지막으로 의례의 경험은 최종목표, 끝을 가진 사고이다. 그것은 변환적인(Transformative)성격을 가진 듯이 보인다. 의례는 희생이나 고통, 또는 깨달음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거나 새롭게 하고 정화하며 자신 안에 혹은 세계에 질서를 회복한다. 미술관 의례가 가져온다고 여겨지는 이로운 점은 전통적인 종교 의례가 제공하는 것과 무척 흡사하게 들릴 수 있다. 미술관 지지자에 의하면 미술관 방문자들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느낌을 받고 돌아가거나 영혼의 양식을 얻었거나 되찾는다고 한다.

 

예술 작품을 공공의 장소에 한데 모으는 유일한 이유는....이들이 일종의 고상한 행복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한다.

잠시 동안이나마 정글처럼 복잡한 삶에서 한적한 장소를 찾아낸 것처럼, 우리의 삶을 떠안을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고

하늘에 대한 기억을 가지면서우리는 재충전된 느낌을 받는다.   

- 케네스 클라크 경 Sir Kenneth Clark -

 

 

 

철학의 범주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 Critical Judgement은 미학에 경도된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는 가장 기념비적인 표현 중의 하나라 하겠다. 거기서 결정적으로 칸트는 인간의 미적 판단 능력을 고립시켰으며, 이를 다른 정신 능력으로부터 구분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미학의 발명은 성스러운 영역에서 세속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정신적인 가치를 전환시켰다. 달리 말하자면 미학자들은 일상의 세계로부터 물러나온 상태를 인식하면서 통상적인 삶이 유예되는 시간과 공간으로의 여정인 리미널리티의 조건에 철학적인 공식을 제공하였다. 철학에서 리미널리티는 미학적인 경험으로 구체화되었고 일종의 전이나 계시로 인도하거나 만들어내는 윤리적, 논리적 이탈의 순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에, 갤러리나 미술관의 등장은 미학적인 숭배를 행할 수 있는 그들만의 의례적인 구역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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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18세기 미술관에 대해 모두가 합의한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부터 어ᄄᅠᆫ 이들은 이미 미술관 특유의 분위기가 진열된 오브제의 의미를 바꾸어놓을 수 있음에 대해, 오브제가 원래 있던 장소와 이전의 용도로부터 떼어놓게 됨으로써 오브제를 예술 작품으로 재정의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작가 필립 오토 룽에와 해즐릿과 같은 이들은 인류의 천재성의 승리라며 이를 환영했지만 다른 이들은 확신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괴테는 드레스덴 미술관을 처음 방문하고 열정적인 묘사를 쓴 지 삼십년이 지난 후, 나폴레옹이 다른 나라로부터 들여온 보물을 조직적으로 모아놓고 이들을 루브르 박물관에 전리품으로 진열한 데 대해 불쾌해 했다. 괴테는 거기서 엄청나게 커다란 미술관 소장품의 탄생이 다른 어ᄄᅠᆫ 것의 파괴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미술관 소장품이 예술 작품이 애초에 만들어지고 이해되었던 조건들을 강압적으로 바꾼다는 점을 알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그도 미술관이 가진 오브제를 예술품으로 틀 짓는 능력, 다른 종류의 의례적인 주목을 하도록 하는 바로 그 지점은, 오브제가 가진 다른 의미 혹은 이전에 가졌던 의미를 무효화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국제적인 미술관 문화는 관객들을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계몽하고 향상시킨다는 개념, 즉 공공 미술관으로서 일차적 책임에 충실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이러한 이상에 대한 근본적인 경쟁 상대인 미학적인 미술관이 우세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에서는 이 새로운 이상이 가장 강력한 지시를 받았다. 주된 지지자들은 모두 부유하고, 교육을 받은 보스턴미술관과 관련된 신사들로서 미학적인 미술관이라는 원칙을 이들 기관들의 공식적 신조로 삼았다. 이들의 원칙을 가장 자세히 기술하고 영향력을 발휘한 저서인 벤자민 아이보즈 길먼의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이상적인 미술관 Museum Ideals of Purpose and Method1918년에 출판되었지만 아이디어는 그 이전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다.

관객은 스스로를 작가의 이미지로 상상하며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의 관념대로 생각하고 그의 감정을 느끼려 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를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심오한 정신적인 계시로 인한 즐거운 감정, ‘절대적이고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라 했다. 길먼은 이를 이탈리안 르네상스의 제단화에 묘사된 신성한 대화 sacred conversation’와 비교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세기에 살았던 성자들이 상상의 장소에 모여 성모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예술은 완벽한 삶필수적인 순수하고 간결한 바로 그 세련된 메시지이며, 그것을 묵상하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중 한 가지이다.

 

길먼이 그렇게도 매료되었던 미술관의 이상은 20세기를 압도할 만한 호소력을 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관은 그가 미술관의 취지라고 보았던 것과 동일한 강도의 몰입감을 유도하도록 디자인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근대 혹은 현대 미술관들은 과거로부터 온 불멸의 영혼들과의 영적 교감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해 오고 있다. 실로 이상화된 과거 혹은 불멸의 영혼이 깃든 물건들과의 접촉에 대한 동경은 아마도 미술관 뿐 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례에서도 언제나 찾아지는 원동력일 것이다.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Edmund Leach는 모든 문화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그것의 결과인 죽음을 거스르려는 상징적 노력을 해왔음을 인식했다.

 

미술 갤러리의 디자인 역사보다 더 극적으로 미학적 미술관의 승리를 드러내는 곳은 없다.

(길먼이나 그의 보스톤 동료들이 열렬히 설교했던)시각적인 명상을 유도하는 독립적 오브제의 설치는 미학적인 미술관이 가지는 특징으로 여전히 남아 있으며, 설득력 있는 영감을 주고 있다.

미술과 시대 the Museum Age에서 제르맹 바젱은 어떻게 근대적 설치가 의례적 장소로서 미술관의 구조 확립을 도왔는가를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각상들은 공간에 분리되어 진열되고, 회화 작업은 서로 멀리 떨어져야 하며, 반짝이는 보석은 검은 벨벳 천에 놓이고 원칙적으로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져 시야에는 한번에 하나의 오브제만 보여야 한다. 도상적 의미, 전반적인 조화처럼 19세기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았던 측면은 이제 형식과 장인정신에 경도된 동시대 미술관 방문객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 시선은 회화의 전체 표면을 천천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바라본다는 행위는 관객과 걸작을 한데 묶는 일종의 최면이 된다(Bazin, The Museum Age, p.265)

 

이 논쟁을 더 발전시켜보면, 미술관이라는 리미널리티적 성격을 가진 공간에서는 모든 것(소화기, 온도계, 습도계 등)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이 비워진 벽면에 분리되어 놓여 미술관 공간에서의 미학화하는 눈 Aesthetizing lens으로 보았을 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져 진열된 것들만큼 흥미로우며 그것들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번역 신현진 미술비평/전시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