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예술

존 레이크먼 [질르 들뢰즈의 입장: 추상미술을 보는 새로운 안목]

하다다 2019. 7. 22. 20:46

Gilles Deleuze (1925~1995)

추상이란 무엇인가? (10줄씩)

오랫동안 논의를 규정해왔던 구도로부터 탈피해 추상화를 재사고해야한다. 지금과는 다른 보다 새로운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추상화를 재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추상적으로'사고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상, 다른 종류의 이론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질르 들뢰즈 Gilles Deleuze의 철학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반플라톤주의적'인 루드비히 비트겐쉬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방식으로 철학에서 추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다른 상을 진척시켰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보다 '경험주의적'이며, '내재론적'이며, '실험적'이다. 동시에 그의 철학은 또 다른 견해를 개괄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보다 '혼돈스럽고 chaotic' 보다 '무형식적 formless' 이며, 더 이상 구상이나 이미지에 대비되어 정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가지 유형의 추상은 예술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서로 교차하게 된다. 일종의 비순수한 혼합으로서 형식들에 선행해서 어떤 외부를 향해 운동하는 재접합체를 혼성해내는 데에 의의를 갖는 추상이다. 들뢰즈에게서는 철학 그 자체가 이러한 추상적인 혼성과 재배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된다. 추상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의 상을 전환시킨다는 것은, 추상적인 사유가 미술, 따라서 미술에서의 추상과 갖는 관계의 상을 전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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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와 '그리고'

추상적이라는 것은 구상적이지 않은 것, 서술적이지 않은 것, 환영적 illusionist이지 않은 것, 문학적이지 않은 것이며, 결국에는 '미술'(혹은 '회화')을 거기에 어떠한 술어도 붙일 수 없고 오직 '부정'을 통해서 via negativ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의 위치에까지 격상시켜 놓아서, 일종의 신성한 부정적 신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결국 말레비치 K. Malevich나 애드 라인하르트 Ad Reinhart, 혹은 스텔라 F. Stella의 <흑색 그림 Black Painting> 등과 같이 단색화 monochrome라는 종점에 이른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는 그런 부정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색화의 공허 이후에 모든 것은 패로디고 인용이며, '아이러니'이고 절충주의, 다른 말로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되고 만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 드라마에서 추상이란 모든 이미지, 형상, 이야기, '내용'을 걷어낸 빈 것, 빈 캔버스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친숙한 관념들의 근원이다. 환영이 제거된 환영주의 공간으로서의 추상화, '내용'없는 순수한 '형식', '장식'이나 연극성 theatricality 일체에 대한 반대로서 순수한 자기지시적 '즉물성 literalness'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가 '모더니즘'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마 이러한 견해 중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컸던 유형인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추상의 한 우너천으로서 부정적 신학의 '아니오'대신에 신플라톤주의적인 혼성 Complicatio의 '중첩 folds'을 좋아한다. 그는 이런 추상적 혼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변적인 전통을 찾아낸다. 들뢰즈가 말하는 추상화는 자기 이외에 자기를 넘어서서 예술형식을 추동하는 '추상적 기계'의 추상화로서 타자들의 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기의 언어로는 계속 '그리고…그리고…그리고'를 더듬거리게 만든다. 그는 '죽어 있는' 계기들 속에서 전진의 다른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어떤 낯선 비유기체적인 생명력과 연관시킨다. 바로 이러한 유형의 생명력, 이러한 유형의 추상화가 우리가 아직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추상이며, 아직도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앞에 존재하는 추상인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책의 페이지가 결코 비어 있지 않으며, 캔버스가 결코 비어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캔버스에 붓을 대기 전에 '아방쿠 avant-coup' [붓 대기 이전]의 단계, 즉 작업장이나 그 밖의 여러 곳에 널려 있는 진부한 생각들을 제거하는 오랜 예비작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캔버스는 항상 너무나 많은 '기존의 사실들', 너무나 많은 개연성들로 뒤덮여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들은 그런 가운데에서 낯선 새로운 가상들 virtualities이라는 '아프레 쿠 après coup' [붓 댄 이후]의 기회를 허용하는 단 하나의 공간을 추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림 그리기를 항상 '히스테리컬한'행위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우리들은 표면을 비어 있거나 공허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집약되어 있는'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ㄸ 이 집약이란 낯선 다른 가능성들로 이뤄진 보이지 않는 가상성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들은 눈이 먼 셈이다. 그럴 경우 우리들은 추상을 어떤 형상이나 이야기의 제거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원래 형태의 혼합이나 합성을 가지고서 다른 공간들을 창출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곧 그 경이로운 '그리고 And'의 세계이다. 그것은 고전적인 환영주의를 벗어난 것일 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형상과 배경이라는 구성 원리를 탈피한 세계이다. 그럴 경우 평면성은 다른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있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형상화 figuration와도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실제로 들뢰즈는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에서 평면적 공간화의 한 유형을 찾아내기도 한다. 색면 aplats의 이용이 그것인데, 이를 통해서 형상들은 (공간 내부에서가 아니라) 공간 다음에 나타나게 되며, 그럼으로써 '사실들'이라는 어떤 생소한 형상성 figurality의 잠재력이 부각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모더니티이자 또 다른 추상이다. 1980년 『천 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s』 중 마지막 고원에서 들뢰즈는 가타리 F. Guattari와 함께 곧장 "그렇다면 현대미술에서 '추상'이 어떻게 불려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의문은 들뢰즈가 60년대에, 그러니까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이후'와 같은 시기이며 회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던 시기에 바로 그 모더니티와 추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오랜 동안의 재숙고를 거친 이후에 나온 의문이다. 현대미술에서 '추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관련해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보여주는 답변("어떠한 윤곽선도 남겨두지 않고, 또 어떠한 형식도 정해주지 않는, 변화무쌍한 방향을 띤 어떤 선")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개념적인 지형도 속에서 벌어진 거대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약간의 감각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추상

폴록의 선

추상의 세계

 

 

느낌은 알겠는데, 내 속에 넣어 소화시키기엔 무리다. 아직은 작품을 보는 힘이나, 미술을 읽는 힘이 부족한 신생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급히 넣어 체할 마음은 없다. 나는 여전히 시키는데로 할 뿐이고, 그러다 보면 나아가겠지. 갑자기 생각난다. 5초의 도약. 

아무것도 모르겠는 이 험난한 글에서 그래도, 이 개념 하나는 갖고자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래서 착안한? 사용한

나의 제목문구 관람객, 그리고

'그리고'엔 참 많은 가능성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