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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단토「최후의 예술작품:예술작품과 실제 사물」

하다다 2019. 7. 22. 20:49

이 논문은 대략 1961~1969년 사이의 예술사에 최후의 예술작품을 다룬 철학적 성찰이다. 논문이란 어떤 면에서 그 자체가 주제의 중요한 일면이다. 결국 논문도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예술가의 존재론적 저급함에 대해 예술가들은 존재론적 지위 격상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실재와 예술의 간격을 메우는 길이었는데 철학적 작업에 걸맞은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예술은 그것이 실재와 구별될 수 없을 때 실패하며 그 반대의 경우에도 실패한다는 것. 이러한 딜레마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데서 벗어나는 길은 기존의 모든 실재 사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비 모방적인 것을 만드는 것. 하지만 모든 있는 그대로의 오브제들이 예술작품으로 간주 될 수 있느냐? 의미있는 형식은 의미론적 파악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비 모방적인 것과 본래의 상태대로 있는 것의 논리적 교차지점이 실제 사물들에 의해 메워질 수 있을 만큼 쉽게 예술작품들로 채워질지도 모르며, 실제로 그 교차지점은 분별할 수 없는 대상의 짝들을 지닐지도 모른다는 것. 명확히 우리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예술과 실재가 상대방의 영역으로 어찌할 수 없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해 주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내야 한다.

보르헤스 ‘피에르 메나르’ 현상. 발음상으로는 구분되지 않는 두 편의 <돈키호테>라는 문학작품이 각기 근본적으로 중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예술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메나르 현상의 선행조건은 작가와 독자가 모두 원작이 아닌 또 다른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인용’도 아니다. 이런 의미의 인용이란 원작의 표현들이 지닌 예술적으로 중요한 특성들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그 표현들을 모사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용이란, 원작과 구분하기 어려우면서 예술작품이 되지 못하는 두드러진 예인데, 존재론적으로 위치 짓기 어려운 것, 곧 예술작품이 아니면서 예술작품과 식별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예로서 간주 되기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동일한 대상이 어떠한 예술사의 맥락에서는 예술작품이 되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가능성과 본질’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식은 ‘진술’이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진술한 내용 중의 적어도 일부는 예술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하나의 진술이기 위해 실재로부터 적절히 일탈하여 있다. 그것은 실재와 예술에 대한 하나의 부분적 진술로서, 실재와 예술의 차이에 대한 의식이 실재와 예술의 차이를 만들게 될 때 그것은 예술사의 국면 속으로 접어든다.

극작가 테스타모비다의 선언으로 삶의 단편이 예술작품 이도록 하는 초예술적 어휘들 (‘배우’, ‘대화’, ‘자연스러운’,‘시작’,‘끝’)을 통해 예술적 진술을 알 수 있다. 또한 직함이란 곧 지위의 권역이다. ‘예술작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기술어가 아니라 귀속어라는 주장이 충분히 타당하다. 귀속성은 특정한 관습에 비추어 보아 대상들에 붙여지게 되는 술어들의 속성이다. 일종의

‘화랑-내-존재’가 있다. 귀속성의 질서에 지배될 수 있는 사물들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조건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며 단지 그렇지 않을 두 가지만을 언급한다. (1) 위조품 : 일단 그것이 가짜임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진술의 구조를 상실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써 지위를 잃게 된다. (2) 비예술적 기원 : ‘예술가’는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귀속어이다. 예술작품이 오직 예술가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분석적으로 옳은 말이다.

예술은 해석의 상황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해석의 매개물이다. 예술과 실재 사이의 공간은 마치 언어와 실재 사이의 공간과도 같은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최소한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예술이 일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점차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왔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반성해온 것처럼 예술 역시 그러하다. 예술과 실재 사이의 경계는 예술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이는 기묘한 방식으로 플라톤의 도전에 직면한다. 그것은 예술의 존재론적 지위를 격상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를 격하시키는 방식이다. 즉 이것은 근본적으로 방향이 잘못 잡힌 접근방식이며, 동떨어진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간주 되어 오던 것(삶과 재현의 관계)을 예술이 자기 속에 가져옴으로써 그 자신을 철학으로 변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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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단토는 인용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예로 넥타이, 그리고 피카소를 얘기했다. 채색된 넥타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피카소밖에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예술작품일 수는 없다. 예술계 자체 내에서 그것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렇지 못했던 일례로 폴리니의 라이벌 화가들 사이 일어난 어떤 시합에 대해 언급했다. 폴리니가 이 시합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끈기’와 ‘실력’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당시에 아무도 해석하지 않아 놓쳐버린 사건이 아닐까. 미술사적으로 다음 시대로 갈 수 있는 것에는 당시 예술적 관념에 가하는 쇼크가 필요하다고 한다. 당시에 이들의 손재주를 예술적 업적으로 바라봐 비평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면 오늘날 이 지문은 그저 하나의 예를 넘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간과한 것들은 많을 것이다. ‘식민주의’,‘페미니즘 미술’ 등 *묵살되거나 고의적으로 억압돼 온 것들을 포함해 지난 기간 동안 생산된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연구하는 고고학자처럼 미술비평가 등 미술사학자들의 역할이 크다.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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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서 단토의 서론에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대 뉴욕의 회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시간과 장소에 한정되어있다. 이미 작고하신 미술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아서 단토에게 묻고 싶다. 주목받을 만큼 과감하게 선택한 단어 ‘최후’라는 말 앞에 ‘당시에’라는 시점이 생략된 것은 아닌지. 나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반론하고 싶다. 첫 번째는 70년대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이다. *미국 태생의 조각가이자 이 유파의 창시자였던 그는 ‘사람들이 미술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요소들을 제거한 것’이라 정의하며 개인의 개성적인 화필이나 감정, 영상, 메시지 등을 제거하는 경향을 보인다. ‘순수한’ 익명의 효과를 획득하기 위해 단순하고 기하학적 형상을 갖춘 재료들을 사용했다.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참고)

두 번째로는 미니멀리즘과 또 다른 특징을 갖추고 있는 단색화를 예를 들어본다. 박서보의 묘법시리즈가 떠올랐다. *“마치 스님이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면서 자기를 비워나가는 행위와 같아요. 여기에 그리는 과정에서 물성이 생기는데, 그 물성과 정신성, 무목적성과 반복성이 혼합돼 합일이 돼야 하는거죠.” 라고 말한 박서보 작품에서 서양의 미니멀리즘이 이미지를 없애는 개념 작업의 산물을 넘어 정신성이 강조되는 비움의 미학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미술 자체를 우상시하지 않으며, 재현과 철학 사이에는 ‘추상’이 존재한다.” 단토가 말하는 재현과 철학을 넘어 80년대 미술을 얘기할 수 있다. (*매일일보 이향휘 기자 "21세기는 정신병동…예술은 폭력 아닌 치유여야" 기사 참고)

 

+++수업 토론 이후

아주아주 말이 안되는 소리라며 교수님의 반박이 이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이 아니신지라 조금은 미안하셨는지 '어쨌든 흥미롭군요'를 덧붙여주셨지만, 하하 안그러셔도 된답니다.